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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카테고리 : 《근대 재발견·100년전 한중일》
백년전 한중일 근대사를 회고해볼 때 동아시아에서 치른 량대전쟁(즉 청일갑오전쟁, 로일전쟁)의 전장터가 모두 조선반도였다는 사실이 주목된다.
왜 조선인이 그 전쟁의 주인공이 아니였는데 조선땅이 일본, 청국, 로씨야 3자 전쟁의 싸움터로 되였는가?
우리의 일반적인 인상 또는 인식에는 일본제국주의의 조선침략의 야망과 그 행위에 직접원인이 있으며 따라서 일본만 탓하고 규탄하는 성향이 강하다. 물론 “고래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을 만들만큼 우리 조선민족이 “약소민족”으로 즐겨 표현되듯이 일본을 비롯한 외세 렬강들의 침습과 강압에 또는 그들사이에 벌어진 싸움가운데서 가늠할수 없는 피해를 입었다는 인식은 십분 타당하다.
그러나 이같은 타당한 인식에 안주하는 우리에게는 랭철히 사색하면 두가지 결정적 사고의 결함이 발견된다.
하나는 세계사적인 시각에서 조선보다 강대한 렬강들의 모순충돌은 결국 우리에게는 그들지간의 “합작”으로서 조선을 쟁탈하는 공동목표의 지배적 드라마로 로정되였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이같은 렬강앞에서 우리는 진정한 력량이 결핍했으므로 중립을 지켜야 했으나 정작 그렇게 하지 못하고 대국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시계의 추같이 그 진촉의 극에는 항상 사대주의(事大主義)가 기다리고있었다는 점이다.
이상의 견해에서 추이하면 일본외에도 청국, 로씨야 등 렬강이 그 양상은 달라보여도 사실은 같이 조선반도를 억압하고 괴롭힌 “공범”이란 점은 틀림없으며 우리가 규탄한다면 이 3자를 공동으로 규탄, 비판하는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만일 렬강의 책임을 추궁한다면 이들의 모두에게 추궁하는것이 타당하다.
당시의 력사적사료들을 섭렵하면서 필자가 주목한것은 조선이 그토록 “독립자주”를 내발적으로 절망(切望)하고 지향했음에도 불구하고 1884년 김옥균, 박영효 등 신예혁명가들이 리드했던 갑신혁명 역시 조선조내부에서 민시를 위시로 한 수구파들이(외래의 힘을 빌어) 박멸했다싶이 스스로 “독립”의 길, 근대화의 길을 차단시킨 우(愚)를 범한다. 갑신혁명은 근대사에서는 조선 근대화를 성공시키는 마지막 찬스였으나 그것이 실패한 탓으로 일본에게 아득히 뒤떨어지게 되는 원인이 되고만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그때의 충격으로 조선이나 청국과 같은 전근대를 고수하는 고루한 나라들과 절교하고 유럽같은 선진적문명을 수용하여 아시아의 근대화를 실현하는 대안을 제시한것이 바로 유명한 “탈아입구론”이였던것이다.
만일 김옥균의 혁명이 그대로 성공하여 그 개혁방안들을 그대로 실행했다면 조선의 근대화는 일본과 많이 떨어지지 않았을것이며 독립자존을 통해 부강한 조선으로 부상되여 오늘의 분단도 미리 막앗을 가능성은 매우 크다.
청일갑오전쟁의 원인의 하나로 꼽는 1894년 1월, 정봉준이 지도한 동학농민전쟁에 대한 조선정부의 대처방법도 청국과 일본군을 끌어들인 장본인이였다. 만여명으로 팽창된 동학농민군을 정부군으로 도저히 진압할수 없어 고종과 민씨정부는 원세개를 통해 청국에 진압군파견을 요청한다. 원세개가 슬그머니 리홍장에게 청군을 요청한 사실을 새로 발견했지만 그것을 조선정부는 묵인하며 또 인가한다. 청군은 “천진조약”에 의해 일본에게 청국군파견을 사전에 통고한다.
이에 응해 일본도 청국에 사전 통고를 하고 일본공사관과 일본인거류민을 보호한다는 리유로 인천에 군대를 파견하게 된다. 이렇게 조선을 에워싸고 청군과 일군의 충돌이 청일전쟁의 발발을 초래했던것이다.
갑신혁명이후 조선을 무대로 청일의 대립이 격화되자 로씨야도 조선의 권리를 겨냥하여 만주국경을 개방시키고 영국도 동양함대를 파견하여 거문도에 포대를 짓고 점령한다.
이대부터 사대주의의 한계를 느낀 조선의 엘리트들은 렬강과 일선을 긋고 독립을 확보하기 위한 “중립화”구상을 하게 된다. 독립협회의 유길준, 서재필의 노력이 그것이였다. 그 구상단계에서 1904년 1월, 고종이 로일전쟁직전에 급급히 “중립선언”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효과가 없었다. 청, 영, 불, 독, 이 등이 승인했으나 일본과 로씨야, 미국도 무시하여 국제적효력이 미미한것으로 끈났다. 가장 긴밀한 관계에 있었던 일, 로의 승인을 받지 못했으며 억울하게도 일, 로가 령토침범할 당시 단연코 막을수 있는 군사력이 조선에는 결여했다. 군사력은 근대화에 함께 병행하는것이나 자주독립의 근대화의 길을 스스로 끊어놓은것 역시 그 자신의 “비극”이기도 했다.
조선이 아닌 세계를 보면 그 당시 유럽렬강사이에서 아우성치던 네델란드는 “중립국”으로 선포하고 1898년 “전민개병”을 실시하여 제1차 대전대는 군사력을 강화시켜 “중립국”을 견지했다.
스위스 역시 1815년 윈회의에서 “영세국외중립국”의 승인을 받고 그뒤 알프스의 천연적장벽을 리용하여 “국민개병”제를 실시하여 “중립국”으로서 성공한 나라의 모델로 발전되였다.
조선이 백여년전 훌륭한 “중립국”비전을 갖고 그것을 적극 실행했다면 오늘의 분단도 없었을것이라고 추찰된다.
필자는 오늘의 동아시아정세가 마치도 백여년전의 국가주의적 내셜내리즘이 팽창하던 그 시기와 류사한 양상을 로정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글로벌화속에서 경제적성장을 이룬 근대의 대국 중국도, 여러 민족 문화를 단위로 독립된 로씨야(구쏘련)와 그 주변의 국가들, 그리고 조선, 한국, 일본의 국가주의는 그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전후 60여년을 거쳐 강화되고 있다.
이런 와중에 조선반도, 한국이 세력균형의 발란스를 잡는 “교량적역할”을 도모하고 싸움터가 아닌 문명화합의 중간지대적 교량으로 탈바꿈하는 비전은 전례없이 중요한 요소로 떠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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